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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풍속

​고려인

The Goryeo People

고려 귀족의 생활

The Life of Aristocracy

초조대장경

The First Tripitaka Koreana

불교공양구

 The Buddhist Offering Goods

차, 술, 향, 악

Tea, Liquor, Incense, Medicine

여성

 Goryeo Women

도량형

Weights and Measures

​복식과 장례

Funeral

​음식과 생활용기, 질그릇

The Food and the Living Bowls, Earthenware

“고려는 여러 오랑캐의 나라 가운데서 문물이 발달하고 예의 바른 나라로 불린다.” 
高麗於諸夷中 號爲文物禮義之邦 - 卷22 雜俗1

​ 서긍은 고려사회를 다른 이민족과는 달리 정신과 물질문화가 잘 정비된 사회로 보았다. 그의 말처럼 그릇과 복식 등의 물품은 품질이 뛰어났고 불교문화도 융성하여 고려 문화의 독창성을 실현하였다. 고려 전기부터 여러 나라의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오랜 노력으로 기술발전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이는 고려사회 특유의 개방성과 역동성으로 토속풍[土風]과 중국풍[華風]이 어우러진 결과물로 평가할 수 있다. 서긍은 고려의 풍속과 문화를 중국 제도의 도입으로 교화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는 중국 문화의 우월감과 자국문화를 기준으로 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려인 The Goryeo People

“옛 사서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舊史 載高麗 其俗皆潔淨 至今猶然 每笑中國人多垢膩 - 卷23 雜俗2 澣濯

 고려인은 몸을 깨끗이 하고 차와 술을 즐겼으며, 음식을 먹을 때는 그릇을 사용하였다. 남자는 예의로 행동하고 부인은 올바름과 신용을 지키며 본성이 인자하여 군자가 끊이지 않는다. 예절에 익숙하고 공경하며, 귀족부터 백성까지 책과 글을 사랑하는 민족이었다. 일반적인 귀족과 서민의 풍속은 무척 검소했다. 유학을 익혀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복식도 잘 갖추었다. 평소에는 흰색 베옷을 입고 검은 두건을 썼다.

 

 생각과 행동은 자유로웠다. 결혼과 이혼이 비교적 쉬었으며, 남자와 여자의 차별도 거의 없었다. 반면에 서긍이 이해하지 못할 풍습도 있었다. 백성들이 아플 때 약보다는 미신을 중시하거나 유독 만남과 헤어짐이 자유로웠던 남녀 관계와 결혼 풍습은 이해하지 못했다. ​​

고려 귀족의 생활 The Life of Aristocracy

“듣기에 (중국)동남쪽의 여러 나라 가운데 고려의 인재가 가장 많다.

고려의 관료 중에서 귀족은 가문의 명망을 서로 높이려고 한다.” 
臣聞東南之夷 高麗人材最盛 仕於國者 唯貴臣以族望相高 - 卷8 人物 

 서긍이 본 고려의 귀족은 “가문의 명망[族望]을 중시하는 사회”였다. 이자겸으로 대표되는 경원이씨 가문의 족망이 가장 높았는데, 그들은 왕실 또는 가문간의 혼인으로 세력을 유지하였다. 사신단을 영접했던 윤언식, 김부식, 김인규, 이지미 등 관리는 모두 명망[族望]이 뛰어난 가문의 출신이었다. 그들은 이자겸 가문과 친분이나 혼인관계로 맺어진 문벌관료라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관료사회에서 고위관리와 귀족층은 아름답고 귀한 물건을 일상적으로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귀족관료는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예의와 분수에 맞는 청렴한 생활을 하였으나 이자겸과 같은 부정축재 세력도 있어 정치적,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초조대장경 The First Tripitaka Kpreana

​대방광불화엄경 권 제1  

大方廣佛華嚴經 卷 第一

고려 11세기
국보 제256호

 “중요한 불경으로는 화엄경과 반야경이 있고 사소한 것은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大經則有華嚴般若 小者不可悉數 - 卷18 道敎 釋氏

 서긍은 궁성 주변에 유명한 사찰만 24곳이 있으며, 왕궁에 필적할 규모의 사찰도 10곳 이상 있었다고 하였다. 특히 별명이 큰 절[大寺]이었던 광통보제사에는 60m가 넘는 거대한 탑과 백동 1만5천근(약 1.5톤)으로 만든 범종이 있었다. 사찰에는 화엄경과 반야경 등 주요 대장경과 함께 불화가 보관되어 있었다. 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을 이겨내기 위해 제작된 ‘초조대장경’과 불교 경전에 주석을 단 ‘교장’이 해당된다. 화엄경과 반야경은 대표적인 초조대장경이다. ‘교장’은 속장경으로도 불리는 화엄경의 주석본으로 의천이 흥왕사에서 설치한 교장도감에서 제작된 것이다. 

불교공양구 The Buddhist Offering Goods

 “불상과 공구(供具)도 모두 깨끗하고 화려한 깃발과 비단 덮개는 배치에 질서가 있었다.” 
佛像供具 皆悉修潔 幡華繒蓋 行列有序 - 卷18 道敎 釋氏

 공양구(供養具)는 불, 법, 승과 부모, 죽은 자의 영혼에게 향, 등, 꽃, 차, 과일, 음식 등의 공물을 바치는 도구이다. 대표적으로 촛대·향로·꽃병 등이 있으며, 기물에 명문(銘文)이 기록된 사례가 많아 자료적 가치가 크다.

 

 보통 청동으로 만들지만, 왕실과 큰 사찰에서는 도금(鍍金)이나 입사(入絲)기법으로 치장하여 공양구에 가치를 더 하였다. 청동은 그릇과 생활용구의 재료로도 폭넓게 활용되었는데, 이는 고려가 장인을 우대하여 청동을 만드는 합금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차, 술, 향, 악 Tea, Liquor, Incense, Medicine

“향림정에서 차를 마시고 바둑을 두며 종일토록 담소하니

이것이 마음을 즐겁게 하고 더위를 쫓는 방법이다.”
烹茶抨棊於其上 笑談終日 所以快心目 而却炎蒸也 - 卷27 館舍 香林亭

“술잔을 주고받을 때는 빈객과 주인이 백번을 배례하여도 감히 예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獻酬之儀 賓主百拜 不敢廢禮 - 卷26 燕禮 燕儀

“조서를 맞을 때는 사향을 피우고, 공적인 모임 때는 독누, 용뇌, 전단, 침수 등을 태운다.” 
迎詔焚麝香 公會則爇篤耨龍腦旃檀沈水之屬。- 卷30 器皿1 獸爐

  고려의 차는 품질이 좋지 않아서 중국 사신이 가져온 납차와 용봉차를 최고급으로 여겼다. 고려에서는 차를 탕(湯)이라고 했는데, 쪄서 말린 차 잎을 갈아 물에 타는 방식의 말차(末茶)를 마셨기 때문이다. 차 도구는 따뜻한 물을 끓이고 보관하기 위한 탕호, 차를 담아 마시는 사발과 잔, 찌꺼기를 버리는 퇴주기 등이 대표적이다. 궁궐에서는 금은기(金銀器)나 비색 청자(翡色 靑磁)로 만든 최고급의 도구를 곁에 두고 항상 차를 즐겼다. 


 서긍은 술도 맛이 없다고 평가했다. 왕은 맑은 법주를 마시지만 서민들은 빛깔이 짙고 맛이 진한 술을 마셨다. 술그릇은 역시 비색 청자로 만든 그릇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 항아리나 병에 비단을 씌워 술을 저장하였고, 마실 때는 병에 담아서 잔에 따라 마셨다. 

한편, 고려 인종이 공이 세운 김부식에게 향약(香藥)을 하사하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아 향과 약은 매우 귀한 물건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향은 궁궐에서는 늘 피워져 있었으며 국가의례에는 특별히 사향을 태웠다. 일부 수입된 향은 왕실이나 귀족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靑磁瓜形注子

청자 참외 모양 주전자

고려 12세기 

靑磁陰刻菊花折枝文花形盞·盞托

청자 음각 꽃무늬 잔과 받침

고려 12세기

靑瓷象嵌菊花紋子盒 

청자 상감 국화무늬 합

고려 13세기 ,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여성  Goryeo Women

 “부인이 몸을 꾸밀 때는 화장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분을 바르지만 붉은 색은 사용하지 않으며 버들같이 그린 눈썹이 이마의 절반을 차지한다.”
婦人之飾 不善塗澤 施粉無朱 柳眉半額 - 卷20 婦人 貴婦

 고려의 귀족 부인은 머리를 오른쪽으로 드리우고, 나머지는 아래로 내려뜨리는데 진홍색 비단끈으로 묶고 작은 비녀를 꽂는다. 그리고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몽수를 쓴다. 몸매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무늬 있는 비단으로 큼지막하게 만든 바지를 입는다.

 

 물들인 끈으로 금방울을 매단 푸른색 조이는 두건을 쓰며, 부귀의 표시로 비단 향주머니를 찬다. 치마는 노란비단을 으로 만들며 겨드랑이까지 끌어올려 높이 묶는데 많이 휘감을수록 고상하게 여긴다. 손에 부채를 쥘 때에는 손톱을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진홍색 주머니로 가리기도 하였다.

도량형  Weights and Measures

“(고려가 송나라의) 정삭(正朔)을 받고 유학을 따르며

음악은 한결같이 조화롭고 도량형은 그 제도가 똑같다.”
然稟受正朔 遵奉儒學 樂律同和 度量同制 - 卷40 同文

​   서긍이 중국과 동일한 문물[同文]을 맨 마지막에 언급하였다. 고려의 국력이 강성해진 네 가지 이유(정삭, 유학, 음악, 도량형) 가운데 도량형을 제일로 꼽았다.

 

 고려의 도량형은 송나라와 거의 동일하였는데 길이, 부피, 무게에서 모두 다섯 단계의 단위[五度]를 사용하였다. 사절단은 고려 생활용기의 모양, 색, 크기, 용도까지 직접 자로 재고 용량을 측정하고 수치를 재어 그 결과를 꼼꼼하게 기록하였는데, 현재 남아있는 고려 유물의 단위를 측정해보면 기록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복식과 장례  Funeral

“(백성의) 복식은 모두 흰모시로 된 겉옷에 네 가닥 띠가 있는 검은 두건을 쓰는데,

베의 곱고 거친 것으로만 구별한다.”
其服 皆以白紵爲袍 烏巾四帶 唯以布之精粗爲別 - 卷19 民庶 農商

​ 왕과 관리의 복식은 벼슬과 때에 따라 다르게 입는다. 왕은 검은 비단 높은 모자와 소매 좁은 담황색 겉옷을 입고 자색비단에 화려한 수를 놓은 허리띠를 하지만, 평상시에는 일반백성과 같이 검은 두건에 흰색 모시 도포를 입는다. 상급관리는 자색무늬 비단옷에 비단 복두를 쓰고 허리에 옥대를 두른다. 하급관리는 녹색 옷에 나무로 만든 홀을 들고 복두를 쓰고, 검은 가죽신을 신는다. 서긍은 고려 관리의 복식은 중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하였다.


  여성의 의복은 흰색 모시 저고리에 노란치마를 입었다. 머리에 쓰는 몽수는 얼굴만 드러내고 땅까지 내려오며, 머리 모양은 어깨로 늘어뜨려 진홍색 비단 끈으로 묶고 비녀를 찔러 봉긋하게 만든다. 부인이 외출하며 말을 탈 때에는 검은 비단 너울을 쓰는데, 너울 끝이 말 위를 덮고 쓰개를 쓴다. 

“죽으면 염만 할 뿐 관에 넣지 않는데, 왕이나 귀족이어도 그러하다.” 
至死 殮不拊棺 雖王與貴胄 亦然 - 卷22 雜俗1 雜俗

石棺

석관

고려

 고려의 장례문화는 국가차원에서 화장(火葬)과 매장(埋葬)을 장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시신을 노출하는 풍장(風葬)이나 다시 묻는 복장(復葬)은 화장과 관련이 있다. 매장은 석곽묘, 토광묘, 옹관묘 등을 만들어 묻혔는데 죽은 이의 신분에 따라 다양한 부장품을 껴묻었다.

 

 귀족은 묘지명을 묻는 예가 많았으며, 질그릇, 청자, 거울, 동전, 가위, 숟가락 등 음식과 관련된 부장품도 점점 늘어났다. 이는 묻힌 이의 내세를 인정하는 사후관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음식과 생활용기, 질그릇 The Food and the Living Bowls, Earthenware

“미꾸라지ㆍ전복ㆍ조개ㆍ진주조개ㆍ왕새우ㆍ무명조개

대게ㆍ굴ㆍ거북이다리ㆍ해조ㆍ다시마 등은 신분에 관계없이 즐겨 먹는다.” 
故有鰌 鰒 蚌 珠母 蝦王 文蛤 紫蟹 蠣房 龜脚 以至海藻 昆布 貴賤通嗜 - 卷23 雜俗2 漁

​   서긍이 본 고려인은 곡류, 채소류, 해산물 등을 즐겨 먹었다. 고기류는 왕실과 귀족만이 양과 돼지고기를 먹었는데, 이는 도살을 좋아하지 않는 풍습과도 관련이 깊다. 곡물은 쌀알이 크고 맛이 단 멥쌀을 섭취했다. 또한 쌀 보관 기술이 뛰어나 창고에 장기간 보관해도 밥맛이 좋다. 한편 서긍이 연회에 나온 10여종의 음식 가운데 국수가 으뜸이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토산품 중에는 인삼, 더덕, 밤의 맛이 좋았다. 

“옛날 기록에 여름에도 잠시 밤을 볼 수 있다고 하여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잘 익은 밤을 질그릇에 담아서 흙속에 묻어두면 해가 지나도 상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舊記謂夏月亦有之 嘗問其故 乃盛以陶器 埋土中 故經歲不損 - 卷23 雜俗2 土産

 서긍은 40여 종의 그릇의 재질, 규격, 용량, 장식 등을 언급하였다. 서민들은 음식이나 식재료를 담는 그릇으로 청동그릇이나 질그릇을 즐겨 썼다.

 

 흙으로 만든 질그릇은 음식을 저장하고 운반하는데 적합하였는데, 특히 항아리는 땅에 묻고 과일을 넣어 두면 장기간 보관할 수 있어 냉장고처럼 사용하기도 했다.